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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 조각/프로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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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와 스파르타 대립 기원전 414년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시라쿠사Syracuse를 점령하려고 대원정군을 보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를 보았다. 전쟁은 아테네 사람들을 난폭하고도 맹렬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416년에 멜로스Melos 섬을 정복했을 때, 거기에 있는 적령기의 사람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학살하였고, 나머지 주민들은 노예로 만들었다.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성Trojan Woman』은 이러한 야만주의에 대한 항의였다. 이 알력은 사상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 하면, 스파르타는 과두정치의 투사였고,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투사였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귀족들 가운데 모반이 일어날까 염려할 이유가 있었다. 기원전 405년에 아이고스포타모이AegosPotamoi 해전의 마지막 패전은 아..
아테네의 암흑 시대 이 시기의 아테네의 탁월성은 지적이었다기보다 예술적이었다. 5세기의 위대한 수학자나 철학자들 가운데 아테네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예외였으나 그는 작가는 아니었고, 다만 구두口頭의 논쟁만 하였을 뿐이다. 기원전 431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돌발, 기원전 429년의 페리클레스의 죽음은 아테네 역사의 암흑 시대를 초래하였다. 아테네 사람들은 해상에서 우위를 차자하였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스파르타가 우위를 견지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 여름 동안 여러 차례 아티카Attica를 점령했다.(아테네는 제외) 그 결과 아테네는 인구가 과다하게 되었고, 게다가 역병이 심하게 만연했다.
5세기 그리스의 위대한 천재들 이 시대에 아테네에서는 대단히 많은 수의 천재를 배출했다. 3대 극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us, 소포클레스Sophocles에 우리피데스Euripides 등이 모두 기원전 5세기에 속한다. 아이스킬로스는 마라톤 전투에 참전했고, 살라미스 해전을 보았다. 소포클레스는 종교적으로는 정동의 편에 있었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는 프로타고라스 및 그 시대의 자유사상의 조류에 영향을 받았다. 신화를 다루는 데 있어서 회의적이며 파괴적이었다.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 소피스트 및 철학자 일반을 조소하였고, 그러면서도 그도 역시 이들 부류에 속하게 있었다. 『향연響宴Symposium』에서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소크라테스와 대한히 친근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조각가 페이디아스Pheidias도 우리..
아테네의 융성과 발전 온화한 민주주의자이자 동시에 온화한 제국주의자였던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융성하게 하였다. 거대한 신전들은 그 폐허가 오늘날까지 아테네의 영광으로 남아 있는데, 페리클레스의 지도 밑에서 건축되었고, 크세르크세스에 의해 파괴되었던 신전들을 대치하였다. 아테네는 그 부에 있어서나 문화에 있어서 급속도의 발전을 보였다. 이와 같은 부흥은 그 부가 주로 외국무역 의존할 때, 또 전통적 도덕성이나 신앙들이 쇠퇴해지는 그런 장소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이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지배권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역사에 관한 개관은 플라톤 및 그 후의 그리스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할 것이다. 제 1차 페르시아 전쟁시 승리의 영예는 주로 아테네로 돌아갔다. 그것은 마라톤에서의 결정적인 승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10년 후인 제2차 페르시아 전쟁시에는, 해상에서는 역시 아테네가 그리스 사람들의 주동력을 이루었으나 지상에서는 주로 스파르타 때문에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 이 때, 스파르타는 그리스 세계의 지도자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그 견해가 편협하여 지역적이었고, 페르시아 세력이 유럽 지역, 즉 그리스에서 쫓겨난 후로는 페르시아에 적대하기를 그쳤다. 그리하여 아테네만이 계속 아시아 지역 그리스의 투사가 되었고, 페르시아에게 정복되었던 여러 섬들의 해방도 아테네가 계속 담당했으며,..
기원전 5세기 아테네가 주동하는 그리스 반도 기원전 5세기 동안에 - 소피스트들이 이 변화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든지 간에 - 아테네에서는 엄격한 청교도적 순진성으로부터 기지에 빠른 잔인한 냉소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기지는 빨리 돌지 않으나 마찬가지로 잔인한 파괴적 정통주의의 경향도 없지는 않았다. 이 세기 초에 페르시아에 대한 이오니아 여러 도시의 투사 아테네가 등장하게 되며, 기원전 490년 마라톤Marathon의 승리를 얻게 된다. 이 세기 말, 기원전 404년에는 스파르타에게 아테네가 패배하고 기원전 399년에는 소크라테스의 박해가 일어난다. 이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잃게 된다. 그러나 문화적 우위는 논의의 여기가 없었고 기독교의승리까지 존속되었던 것이다.
아테네의 정치학설들 기원전 5세기 말의 아테네에는 그들의 동시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금일의 민주주의 국민에게도 비도덕적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그런 정치학설을 가르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국가론Republic』 제 1권에 트라시마쿠스는 강자의 이익 이외에 또 다른 정의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의한다. 그리고 법률은 정부가 그들의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힘과 힘의 투쟁에 있어서 재판관이 될 만한 공정한 표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플라톤의 『고르기아스Gorgias』에 보면, 칼리클레스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자연법은 강자의 법률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편의상 강자를 제외할 제도와 도덕적 규정을 만들었다. 이런 학설은 고대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더욱 찬동자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
플라톤 철학에서 논의를 진술하는 악습 플라톤은 그 견해를 진술할 때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덕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지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지적으로 정직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사회적 결과를 고려하면서 학설을 세우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는 실지로 자기 논의를 덕스러운 결과가 되도록 왜곡하면서도, 자기는 순수한 이론적 표준을 따르고 또 그것으로 판단하는 체한다. 그는 이와 같은 악습을 철학에 도입하였다. 그 후에는 이런 악습이 계속 존속하여 왔다. 플라톤은 소피스트에 대한 적개심에서 그의 '대화편'에 그와 같은 특성을 주게 되었던 것 같다. 플라톤 이후의 모든 철학자들의 공통적 결함은, 그들의 윤리 문제의 탐구에 있어서 미리 어떤 결론에 도달해야 하겠다는 것을 예상하여 놓고 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