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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 조각/프로타고라스18

아테네와 스파르타 대립 기원전 414년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시라쿠사Syracuse를 점령하려고 대원정군을 보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를 보았다. 전쟁은 아테네 사람들을 난폭하고도 맹렬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416년에 멜로스Melos 섬을 정복했을 때, 거기에 있는 적령기의 사람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학살하였고, 나머지 주민들은 노예로 만들었다.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성Trojan Woman』은 이러한 야만주의에 대한 항의였다. 이 알력은 사상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 하면, 스파르타는 과두정치의 투사였고,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투사였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귀족들 가운데 모반이 일어날까 염려할 이유가 있었다. 기원전 405년에 아이고스포타모이AegosPotamoi 해전의 마지막 패전은 아.. 2015. 9. 25.
아테네의 암흑 시대 이 시기의 아테네의 탁월성은 지적이었다기보다 예술적이었다. 5세기의 위대한 수학자나 철학자들 가운데 아테네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예외였으나 그는 작가는 아니었고, 다만 구두口頭의 논쟁만 하였을 뿐이다. 기원전 431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돌발, 기원전 429년의 페리클레스의 죽음은 아테네 역사의 암흑 시대를 초래하였다. 아테네 사람들은 해상에서 우위를 차자하였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스파르타가 우위를 견지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 여름 동안 여러 차례 아티카Attica를 점령했다.(아테네는 제외) 그 결과 아테네는 인구가 과다하게 되었고, 게다가 역병이 심하게 만연했다. 2015. 9. 18.
5세기 그리스의 위대한 천재들 이 시대에 아테네에서는 대단히 많은 수의 천재를 배출했다. 3대 극작가, 아이스킬로스Aeschylus, 소포클레스Sophocles에 우리피데스Euripides 등이 모두 기원전 5세기에 속한다. 아이스킬로스는 마라톤 전투에 참전했고, 살라미스 해전을 보았다. 소포클레스는 종교적으로는 정동의 편에 있었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는 프로타고라스 및 그 시대의 자유사상의 조류에 영향을 받았다. 신화를 다루는 데 있어서 회의적이며 파괴적이었다.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 소피스트 및 철학자 일반을 조소하였고, 그러면서도 그도 역시 이들 부류에 속하게 있었다. 『향연響宴Symposium』에서 플라톤은 아리스토파네스를 소크라테스와 대한히 친근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조각가 페이디아스Pheidias도 우리.. 2015. 9. 10.
아테네의 융성과 발전 온화한 민주주의자이자 동시에 온화한 제국주의자였던 페리클레스는 아테네를 융성하게 하였다. 거대한 신전들은 그 폐허가 오늘날까지 아테네의 영광으로 남아 있는데, 페리클레스의 지도 밑에서 건축되었고, 크세르크세스에 의해 파괴되었던 신전들을 대치하였다. 아테네는 그 부에 있어서나 문화에 있어서 급속도의 발전을 보였다. 이와 같은 부흥은 그 부가 주로 외국무역 의존할 때, 또 전통적 도덕성이나 신앙들이 쇠퇴해지는 그런 장소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이다. 2015. 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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