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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 조각/들어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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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와 전통주의의 견제와 협력 역사의 긴 세월 동안 존속해 온 이 논쟁의 양측 모두 다 각기 부분적으로는 옳고 부분적으로는 틀렸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회적 결속은 하나의 필수적인 일이다. 그리고 인류는 다만 합리적 논의에 의해서만 이 사회적 결합력을 이루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어느 사회나 모두 두 가지의 정반대되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즉, 한편으로는 너무 과도한 규율과 전통에 대한 존중으로 화석화될 위험이고, 또 한편으로 사회적 협력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개인주의와 개인적 독립성의 발전으로 인한 분열과 외적 정복자에게 정복당할 위험성이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문명들은 견고한 미신적인 체계로부터 출발하여 점차로 완화되어 가서, 어떤 단계에 이르면 낡은 전통의 장점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리고 이 분해에 따르는 악은 아직도 발전되지 ..
철학의 발전을 통하여 유지되어 온 두 부류의 분류 기원전 600년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긴 발전을 통해 철학자들은 두 부류로 분류되어 왔는데, 사회적 결합을 강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결합을 완화시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꼭 이 두 부류에 속하지 않는 다른 철학자들도 모두 이 차이와 관련시킬 수 있다. 규율주의자規律主義者disciplinarian들은 낡은 것이든 새 것이든 일정한 교의敎義 체계를 제창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과학에 대해 적대시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그들의 교의란 것은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행복이라는 것이 반드시 선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고상함'이라든지 또는 '영웅적 행위' 등이 더 좋은 것이라고 가르쳐 왔다. 그들은 인간성에서 비합리적인 부분..
주관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자유주의 사상 현대에 와서는 이와 같은 불건전한 주관주의에 반대하여 여러 가지 반동이 일어났다. 첫째로, 중간적 타협 철학으로 자유주의 사상이다. 이것은 정부와 개인에게 각각 그 한계를 부여하려고 한다. 이 주의는 현대형으로서는 로크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감정' - 재세례파의 개인주의 - 을 반대하며, 동시에 절대권위나 전통에 대한 맹종 등도 반대한다. 더 철저한 반동은 국가 숭배사상으로 이끌어 갔다. 카톨릭주의에서 교회나 또는 때로는 신에게 부여했던 지위를 국가에 대해 부여했다. 홉스나 루소, 헤겔은 이 학설의 다른 한 면을 보였다. 그들의 사상은 실제적으로는 크롬웰이나 나폴레옹, 현대의 독일에서 실현되었다. 공산주의는 그 학설에서는 그러한 철학자들과 대단히 거리가 멀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국가숭배의 결과로 나타나..
낭만주의 사조의 심미적 명상의 대상 예술에서나 문화에서나, 또 정치에서 팽배하던 이와 같은 낭만주의 사조는 인간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고, 즐거운 심미적 명상의 대상으로 보는 주관주의적 방법과 결합되고 있다. 호랑이는 양보다 더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는 호랑이를 울타리 속에 가두어 두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대표적인 낭만주의자들은 이 울타리를 제거해 버리고, 울타리를 나온 호랑이들이 양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뛰어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사람들이 원하여 스스로 호랑이가 되었다고 상상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성공했을 때 그 결과는 반드시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무정부주의적 기류와 감성의 숭배 철학에서의 주관성이 일단 해방되자, 그것이 막다른 길에 다다르기까지 어느 제한 속에서 구속될 수가 없었다. 도덕에 있어 프로테스탄트의 개인 양식에 대한 강조도 그 본질은 무정부적이었다. 반면에, 관습이나 풍습이란 것도 뮌스터의 경우와 같은 우연적인 폭발을 제외하면 너무나 강한 것이어서, 윤리에서의 개인주의의 제자들까지도 전통적 덕행을 계속 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안한 균형이었다. 결국, 18세기의 '감성' 숭배는 이 불안한 균형을 깨뜨려 버렸다. 행위가 그 결과 여하로, 또는 어떤 도덕률과의 부합 여부에 따라 가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고무하는 정서 때문에 찬양을 받았다. 이와 같은 태도는 칼라일이나 니체에서와 같은 영웅숭배로 발전해 갔고, 바이런에서와 같은 어떤 ..
정치에서의 무정부주의와 철학에서의 주권주의 정치에서의 무정부주의는 철학에서의 주권주의를 언제나 동반한다. 이미 루터의 생존시에 환영받지 못하고 인정받지도 못한 제자들이 재세례파再洗禮派Anabaptism의 교리를 발전시켰다. 이 교파는 한때 뮌스터Minster 시를 지배하기도 했다. 재세례파는 모든 법률을 배척했다. 왜냐 하면, 선인은 순간순간 성신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어떤 일정한 형식에 매일 수가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전제로부터 그들은 공산주의와 성적 난혼주의亂婚主義로까지 발전해 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영웅적인 저항 끝에 근절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교리는 그 약화된 형태로 네덜란드·영국·미국 등으로 퍼져 갔다. 퀘이커교Quakerism는 역사적으로 볼 때 여기서 온 것이다. 19세기의 종교와는 아무 관련성도 없으나 더 격렬한 ..
현대 철학의 출발은 데카르트로부터 현대 철학은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근본적 확실성은 자기 자신의 존재와 사유의 사실이었다. 외계外界는 여기서부터 추리되는 것이다. 이것은 버클리·칸트·피히테로 이어지는 일련의 발전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다 자아Ego의 발산물에 불과했다. 이것은 불건전하다. 그리하여 철학은 이 극단으로부터 일상적인 상식의 세계로 피해 나오려고 계속적으로 노력해 왔던 것이다.
종교개혁이 미친 철학에의 영향 교회보다는 성경중심의 변화는 중대한 결과를 야기시켰다. 진리는 이미 협의체에 의해 확인될 수는 없는 것이고, 다만 내적 명상에 의해서만 확인되어야 하였다. 이 결과는 이미 카톨릭의 정통적 구조에는 들어맞기 어렵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주의도 단 하나만 있을 수는 없었고, 많은 교파들이 생겨났다. 스콜라 철학에 대항하는 철학도 하나만은 아니었고, 철학자의 수만큼 철학의 수도 생겨났다. 13세기에서와 같이 교황에 대항하는 황제도 하나뿐만 아니었고, 많은 이교의 왕들이 대립했다. 문학에서나 사상에서나 모두 마찬가지로, 점차 더욱 심화해 가는 주권주의를 일으켰고, 이것은 처음에는 정신적 노예상태에서 건전한 해방을 가져왔으나, 점차로 사회적 건전성과는 적대되는 개인적 고립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