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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사상/동양 윤리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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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대한 확인과 이것의 실천과 관련한 본격적인 이론적 모색은 천명天命 사상의 탐구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사단 칠정四端七情 논쟁을 통해 구체화하였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순선한 마음인 사단四端과 선하든 악하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인 칠정七情을 이理와 기氣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이황은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그것에 따르는 것이고理發而氣隨之,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그것에 탄 것이다.氣發而理乘之"라는 이기 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이황은 "배는 당연히 물 우치를 가야 하며, 수레는 당연히 땅 위를 가야 한다. 이것이 이里이다. ······ 임금은 어질어야 하며, 신하는 공경하여야 하며, 아비는 사랑하여야 한다. 자식은 효도하여야 한다. 이것이 이理이다."라고 하여..
유교 사상과 성리학 - 도덕적 이상 사회 삼국 시대에 이미 유교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우리나라는 지속적으로 정치 원리로서뿐만 아니라 윤리 사상과 생활 원리로서 유교 사상을 폭넠게 응용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 원元나라로부터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수용하였고,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은 정치와 교화의 원리로 채택되어 조선의 통치 이념이자 윤리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 초기의 학자들은 성리학의 초보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왕성한 이론 탐구와 더불어 도덕적 실천에 주목하였다. 도덕적 인간관의 확립을 위해 그들은 자아를 수양하여 도덕적 인격 완성에 이르는 실천적 방법을 제시하였고, 더 나아가 현실적인 정치에 이를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도덕적 이상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유교에서 수신修身과 수양修養은 근본 유교 사상에서는 '남에게 지식을 내보이는 공부[爲人]'는 잘못된 것이고, '자기 내면의 성숙을 위한 공부[爲己]'가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자신의 가능성을 온전히 실현하고[成己], 나아가 다른 사람과 다른 존재의 잠재성도 온전히 실현하는 사람[成物]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되풀이해서 '자기 성찰'과 '자기 반성', '자신을 돌이켜 정성 되게 함[反身而誠]' 등과 같은 공부를 강조하는데, 이것이 곧 일반적으로 말하는 '수신' 혹은 '수양'이다. 유교에서 수신은 모든 것의 근본이다. "맹자"와 "중용"은 모두 "성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誠 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고 언급한다. 여기서 '성 되고자 하는 것'은..
'효'를 어떻게 실천하야 하는가? 초나라 섭공葉公이란 자가 공자와의 대화 중 자기 고장에는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그 죄를 고발하고 증인으로 나선 정직한 아들이 있다고 자랑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공자는 이렇기 말하였다. "우리 고장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다릅니다. 그런 일이 똑같이 일어난다면,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덮어 주고, 아들은 아버지의 죄를 덮어 줍니다. 정직은 그 가운데 있습니다. - "논어論語 " -
한·중·일 삼국 유교 사상의 지역적 특징 한·중·일 삼국을 비교해 보면 유교 사상의 전개와 발전은 학국과 중국에서는 대체로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만, 일본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사회적 역할 측면에서 중국과 한국의 유교 사상은 주류 문화로서 교육과 통치 이념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반면에, 일본의 유교 사상은 신도와 불교의 영향으로 주도적 위치에 오르지 못하였다. 일본에서는 줄곧 불교의 영향이 강했고, 에도 시대에 들어서야 주자학이 관학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주자학은 중국이나 한국과 달리 불교를 비판할 때 계속해서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성리학 내부의 다른 학파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삼국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주자학이 형성된 이후에도 중국에서는 심학心學이 용인되었으며, 결국에는 양명학이 주도적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한국에서 양명학은 ..
주자의 성리학 - 성즉리, 본성이 곧 이치 주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은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이치[理]라고 주장하여 본성이 곧 이치[性卽理]라고 하였다. 주자는 이 본성을 선한 것이라고 보아 '본래 그러한 성품[本然之性]'이라고 하였다. 그는 도덕적 행위의 근거를 천리天理에 둠으로써 도덕 행위의 근거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만물을 이치와 기가 합하여 형성되므로, 우리의 본성에도 기에서 유래한 기질의 성[氣質之性]이 있다. 기질로부터 드러나는 구체적인 내용은 감정[情]과 욕구[慾]이고, 이것이 지나치면 악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주자는 올바른 사람이 되려면 기질을 순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그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앎을 늘려 나가며[格物致知], 양심을 보존하여 본성을 함양하고 나쁜 마음이 스며들지 않도록 잘 살..
유교 사상의 전개 - 진나라 이후 송대까지 전쟁과 분열을 겪으면서도 사상적으로는 자유를 누렸던 춘추 전국 시대는 진秦나라가 통일 제국을 성립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진나라는 유가적 도덕 담론을 외면하고 법가·병가의 부국강병책을 중시하였고, 분서갱유를 일으켜 사상계의 침체를 불러왔다. 그 후 진나라를 이은 한漢나라에 이르러 다시 유학이 부활하였다. 특히 무제武帝(서기전 159~서기전 87)가 유학을 국학國學으로 삼으면서 분서갱유로 말미암아 없어진 경서의 복원이나 그 내용에 대한 주석을 주로 하는 경학과 훈고학이 발달하였다. 유학은 당대唐代에도 국학의 위치에 있었으며, 송대宋代에 이르러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도가 사상과 불교 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선진 유학을 재해석하고 체계화하려고 한 것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우주 만물의 존재와 변화..
법가 사상의 대표자 한비자 한비자韓非子(서기전 280? ~ 서기전 233)는 순자의 제자로서 법가를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그는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의 영향을 받아 법가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는 "인간은 이기적이며 간사한 지혜에 차 있기 때문에 믿을 수 없고, 오직 상과 벌로써만 다스릴 수 있다."라고 주장했고, 통치의 근간을 법과 처벌[刑]에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정치의 요체는 법法과 부하를 거느리는 기술[術], 세력[勢]의 확보에 있다고 보았다. 법가 사상은 진시황이 춘추 전국 시대를 끝내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나라를 세우는 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