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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 조각/들어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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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톨릭 교회와 신교의 교회를 보는 차이점 카톨릭 교회는 세 가지 근원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성스러운 역사는 유태인에게서, 신학은 그리스 사람에게서, 정치와 헌법은 적어도 간접적으로는 로마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종교개혁은 로마적인 요소를 거부했고, 그리스적인 요소를 약화시켰으며, 유태적인 요소를 대대적으로 강화시켰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은 로마 제국과, 그리고 후에 로마 교회에 기인하는 사회적 결속을 파괴해 버리는 국가주의 세력과 손을 잡게 되었다. 카톨릭 교리에 의하면, 신의 계시는 성경에 제시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매개로 하여 시대에 따라 계속적으로 계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에 대해서는 누구나 개인의 의견을 복종시킬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신교는 계시의 매개자로서의 교회를 부인했다. 진리는 다만 성경 ..
종교 개혁이 성공하게 된 이유 16세기 이후의 유럽의 사상사는 종교 개혁에 의해 지배되었다. 종교 개혁은 복잡한 다면적인 운동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게 된 것도 이 원인의 다양성에 있었다. 종교 개혁은 주로 북방 민족의 로마 지배에 대한 반역이었다. 로마는 지금 새로운 지배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 북방 민족을 복종시킨 힘은 종교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종교가 쇠퇴해 버렸다. 교황 제도는 한 제도로서 남아있었고, 독일과 영국으로부터 거액의 공물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경건했던 이 민족들은 이미 보르지아 가문이나 메디치 가문에 대해 아무 존경심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돈만 내면 영혼을 연옥에 떨어지지 않게 구원할 수가 있다고 선언하고, 그 돈으로 사치와 타락에 열중했던 것이다. 민족적 동기, 경제적..
정치적 무질서 상태에서 힘을 발휘하는 마키아벨레의 『군주론』 이 정치적 무질서 상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君主論The Prince』에 잘 나타나 있다. 아무 지배원리도 없는 곳에서는 정치란 다만 노골적인 정권 다툼이 된다. 『군주론』은 이 경쟁에서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가에 대해 지혜로운 충고를 하고 있다. 그리스의 위대한 시대에서 연출되었던 것이 바로 르네상스기의 이탈리아에서 다시 연출되었다. 전통적, 도덕적 구속은 소멸되고 말았다. 그런 것들은 마치 미신과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졌다. 이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은 개인들을 활력있고 창조적이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보기 드물게 천재들을 많이 배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덕의 부패로부터 필연적으로 결과되는 무정부 상태와 배신은 이탈리아 사람으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무능력해지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
15세기 국가주의 군주 - 교황과 황제로부터의 권력 장악 예술을 제외하면 다른 어느 분야에서나 마찬가지로 정치학설에서도 질서의 붕괴를 보았다. 중세는 비록 그 실천은 거칠었으나 사상은 율법에 대한 열정과 정권에 대한 매우 정확한 학설이 지배하고 있었다. 모든 권력은 궁극적으로는 신으로부터 근원한다. 신이 성스러운 일에 대한 권력은 교황에게 부여했고, 세속의 문제는 황제에게 권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15세기에 와서는 교황이나 황제 모두 그들의 중요성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교황은 다만 이탈리아의 군주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도 무법한 권력 정치 놀이에 한몫 끼고 있었다. 프랑스나 스페인, 영국에 새로 등장한 국가주의 군주들은 그들 자신의 영토 내에서는 교황도 황제도 아무 간섭을 할 수 없는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민주국가는 주로..
중세 철학의 파괴와 르네상스의 태동 중세의 철학적 종합은 단테 이후에 정치적, 지적 이유로 파괴되었다. 이 종합적 체계가 존속했을 때도 그것은 소규모의 정돈된 완전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 체계 속에서 고려되던 것도 매우 한정된 범위의 르네상스 교황 제도의 큰 알력을 마침내 종교 개혁을 야기시키게 되었다. 이로써 교황 중심의 기독교의 통일성은 파괴되었고, 또 스콜라 철학적 정부론도 파괴되고 말았다. 르네상스 시기에 일어난 고대와 지구 표면에 대한 새로운 지식은 기존 사상 체계들에 대해서 권태를 일으켰고, 그래서 그것은 단지 정신적 감옥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은 지구와 인간에 대해 프톨레마오스의 학설에서 향락해 오던 지위보다 더 겸손한 지위를 부여했다. 지식 있는 사람들은 이미 이런 새로운 사실들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
중세 철학의 거울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교회로부터 독립하려는 튜턴족의 노력은 다만 정치 분야에서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또 예술·소설·기사도騎士道·전쟁 등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나 지적 세계에서는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은 교육이 전적으로 교직자들에게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표면에 나타난 중세의 철학은 그 시대의 정확한 거울이 아니었다. 다만, 어느 한 부분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성직자들 사이에도 특히 프란체스코 교단의 수도사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교황과 불화한 사람들이 많았다. 더욱이 이탈리아에서는 문화가 알프스 북방보다 수세기 앞서고 있었으므로 속인들에게 까지 보급되었다. 새로운 종교를 발견하려고 노력한 프리드리히 2세는 반교황문화의 극단적인 대표자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교회가 왕들에게 승리한 이유 군대는 왕들의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승리를 얻었다. 교회가 승리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교회가 교육을 독점했다는 점이고, 또 왕들이 언제나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이다. 그러나 극히 소수의 예를 제외한다면, 통치자들이나 인민들이 모두 마찬가지로 교회가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깊이 믿었다는 것이 그 주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교회는 왕이 영원히 천국에서 지낼 것인지, 지옥에서 지내야 할 것인지를 결정할 수가 있었다. 또, 교회는 신하들에게서 군주에 대해 충성해야 할 의무를 제거하여 동시에 모반을 선동할 수가 있었다.게다가 교회는 무정부적 상태 대신에 질서를 대표하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 발흥하는 상인계급의 지지를 받았다. 더욱이 이탈리에서는 이 조건이 ..
세속적인 권력을 가진 튜턴Teuton족의 왕들이나 귀족 이와 반대로, 세속적 권력은 튜턴Teuton족의 왕들이나 귀족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들은 독일의 삼림 속에서부터 가지고 있던 제도를 가능한 한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들의 제도로 보아서는 절대권이란 낯선 것이었다. 또, 이 활동적인 정복자들의 눈에는 침체되고 생기 없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왕은 그의 권력을 봉건적 귀족들과 나누어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은 다 같이 전쟁·살인·약탈·침략 등으로 그들의 감정이 때때로 폭발되어야만 만족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들에게서 마치 오늘날의 고용주들이 고용인에게 요구하고, 또 그것을 획득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규칙성 있는 선행이란 것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기분이 움직이는 대로 술도 마시가 살인도 하고, 또 사랑도 할 수 없다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