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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6

정약용의 민본주의 사상과 주체적인 문화론 정약용의 사상은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임금이 아니라 백성이 근본이라는 주장을 전개하여 개혁 사상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그는 나라의 근본이 되는 백성들이 피폐한 삶을 살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하여, 여전제閭田制, 정전제井田制 등의 토지 제도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 토지 제도는 빈부 격차를 해소하고, 일하지 않는 사람을 줄이고, 세금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밖에도 정약용은 당시까지의 주류 사상인 성리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철학을 정립하였다. 그는 상제가 세계를 다스리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전달되는 상제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마음속에 완전한 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철학을 구성하기 위한 방법으로 경전을 철저하.. 2016. 9. 11.
정약용의 유배 기간 동안의 학문 활동 개혁을 추진하던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자, 정조의 개혁을 도왔던 이들은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된다. 정약용도 전라남도 강진 등에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낙담했던 정약용은 마음을 다잡아 유배 생활 내내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이 동안 경세학과 더불어 사상의 한 축을 이루는 경학에 대하여 집정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 이후 고향 경기도 마재로 돌아와 다시 18년간 학업에 열중하여 미완이었던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탈고하였다. 이런 자신의 학문 세계에 대하여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관한 나의 책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으니 근본과 말단을 구비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의 저술은 분량도 방대하.. 2016. 8. 30.
조선 개혁을 다짐하는 정약용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972~1836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경제적으로 피폐해졌고 정치적으로 당쟁을 일삼았으며, 관료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곤궁해졌다. 다산 정약용은 이런 상황이 더욱 심해진 18세기 후반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를 지을 정도로 총명하였고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여러 개혁적 학자들과 접촉한 그는 당시의 조선을 개혁하기 위한 학문인 실학을 연구한 이익李瀷의 저술을 읽고 자신도 이러한 학문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20대 초반에는 당시 조선을 개혁하려는 신진 학자들과 더불어 천주교와 서양 과학 기술을 접하기도 하였다. 이후 관직에 진출해서는 뛰어난 재능과 학문으로 정조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의 조선을 뜯어고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정.. 2016. 8. 15.
정약용의 성기호설性嗜好說 -맹자요의孟子要義 정약용은 인간의 성性을 어떤 구체적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기호로 파악한다. 그가 말한 바로는 기호에는 영지靈知의 기호와 형구形軀의 기호가 있다. 영지의 기호란 우리가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미워하며 덕행을 좋아하고 더러움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다. 이것이말로 인간만이 가지는 본성이며, 하늘이 명한 성품이다. 형구의 기호란 우리의 눈이 좋은 빛깔을 좋아하고 입이 맛있는 요리를 즐기며,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 것읍 좋아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이것은 동몰도 가지는 품성이다. - 정약용, "맹자요의孟子要義" - 2016.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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