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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 조각/그리스 문명

다리우스Darius 황제 시절의 이오니아 지방의 철학자들

by 앞으로가 2015.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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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는 그 전체가 이오니아의 산물이었다. 즉, 그리스의 소아시아와 이에 인접한 섬들의 산물이었다. 늦어도 기원전 6세기 동안까지는 이 호머의 시는 현재 있는 형식으로 다 고정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리스의 과학·철학·수학이 시작된 것도 이 기간 동안의 일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세계의 도처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공자·부처·조로아스터가 생존하였다면, 아마도 이 시기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조로아스터의 연대는 대단히 불확실하다. 어떤 책에는 기원전 1000년까지 소급한다. 이 세기의 중엽에 키루스Cyrus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세기가 끝날 무렵에 이오니아의 그리스 여러 도시는, 아직까지 페르시아에게 제한된 자치를 허락 받아 온 데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아무 열매도 거두지 못하였고 다리우스Darius 황제에게 진압 당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훌륭한 인물들은 모두 유형流刑을 당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철학자들 가운데도 피난민이 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헬레니즘의 세계 가운데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지방을 이 도시 저 도시로 방랑하고 다니면서, 그 때까지는 아직도 이오니아에 국한되어 있던 문명을 도처에 보급시켰다. 그들은 방랑 중에 친절한 대우를 받았다. 크세노파네스Xenophanes는 6세기 후반에 활동한 사람인데, 그도 이 피난민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방랑 생활은 겨울에 노변에서 좋은 식사 끝에 단술을 마시고, 이집트 콩을 씹으면서 부드러운 안락의자에 누워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곤 하는 것이었다.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그리고 연세는 몇이나 되시는지요? 그러면 메디아 사람이 왔을 때는 몇 세셨던지요?" 이오니아 이외의 그리스의 여러 도시는 살라미스와 플라타이아이 전쟁의 승리로 독립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 후에 이오니아도 일시 해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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