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결속과 개인의 자유의 관계도 종교와 과학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전 시기를 통해 투쟁의 상태에 있든지 또는 불안정한 타협의 상태에 있든지 하였다. 그리스의 사회적 결속은 도시 국가에 대한 충성심에 의해 확보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까지도, 이미 그의 시대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도시 국가를 없애 버리고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시 국가에 대한 정치제도의 장점만 찾고 있었다. 도시 국가에 대한 의무감이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그 구속의 정도도 변화가 크다. 스파르타에서는 오늘날의 독일(제 2차 세계 대전 이전의 독일)이나 러시아의 경우처럼 자유가 적었다. 아테네에서는 때때로 일어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때로는 국가의 구속에서 놀라운 자유를 가진 때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의 그리스 사상은 도시 국가에 대한 종교적, 애국적 헌신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그리스 사상의 윤리체계는 시민 생활과 관련된 체계이며, 정치적 요소가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을 때는, 즉 처음에는 마케도니아 인에게, 그리고 뒤에는 로마 사람에게 예속되었을 때는, 그들이 독립 상태에 있었을 때 적합하던 개념은 이미 적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전통의 파멸에 의한 활기의 상실을 가져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 개인적이며 사회성이 없는 윤리를 초래했다. 스토아 학파는 덕스러운 생활을 영혼과 신의 관련하에서 생각했고, 시민과 국가의 관계로서 보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기독교를 위한 길을 준비했다. 기독교도 본래는 스토아 철학과 같이 비정치적이었고, 처음 3세기 동안은 기독교 신봉자가 정부에 대해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이르는 6세기 반 동안의 사회적 결속은 철학이나 옛날의 애국심에 의해 확보된 것이 아니고 힘에 의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군대의 힘에 의해, 그리고 다음에는 행정 당국의 권력에 의해 확보되었다. 로마 군대, 로마의 도로, 로마의 법률, 로마의 관리들이 처음으로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국가를 창설했고, 또 보존했다. 이 어느 하나도 로마 철학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도대체 로마 철학이라는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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