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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분열을 겪으면서도 사상적으로는 자유를 누렸던 춘추 전국 시대는 진秦나라가 통일 제국을 성립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진나라는 유가적 도덕 담론을 외면하고 법가·병가의 부국강병책을 중시하였고, 분서갱유를 일으켜 사상계의 침체를 불러왔다. 1
그 후 진나라를 이은 한漢나라에 이르러 다시 유학이 부활하였다. 특히 무제武帝(서기전 159~서기전 87)가 유학을 국학國學으로 삼으면서 분서갱유로 말미암아 없어진 경서의 복원이나 그 내용에 대한 주석을 주로 하는 경학과 훈고학이 발달하였다.
유학은 당대唐代에도 국학의 위치에 있었으며, 송대宋代에 이르러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도가 사상과 불교 철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선진 유학을 재해석하고 체계화하려고 한 것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우주 만물의 존재와 변화를 탐구하는 이기론理氣論에 근거하여 형이상학적 체계를 갖추어 설명하였다. 주돈이周敦이(1017~1073)의 "태극도설"에서 구체화한 이런 문제의식은 여러학자를 거쳐 주자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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