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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과 세상/도덕과 자율

정해진 운명이란 있는 것일까?

by 앞으로가 201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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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리金東里 1913~1995


소설가, 시인,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 사상과의 대립을 통해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고, 6·25 전쟁 이후에는 인간과 이념의 갈등에 주안을 두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화랑의 후예”, “무녀도”, “역마”, “황토기”, “등신불” 등이 있다.



주인공 성기의 사주에는 늘 분주하게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액운을 뜻하는 역마살驛馬煞이 들어 있다. 성기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역마살이 있어 구름같이 떠돌아다니는 삶을 살았다고 여긴다. 성기의 역마살을 막기 위해 할머니와 어머니는 갖은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다.


화개 장날만 책전을 파는 성기는 내일 장 볼 준비도 할 겸 하루를 앞두고 절에서 마을로 내려오고 있었다. 처음엔 글을 배우러 간다고 할머니에게 손목을 끌리다시피 하여 간 곳이 절이었으나 요즘은 매일같이 듣는 북소리, 목탁 소리, 은행나무, 염주나무, 이런 것까지 모두 싫증이 났다. 


당초부터 어디로나 훨훨 가 보고 싶던 것이 소망이었고, 그러나 어디로 간다는 건 말만 들어도 당장에 두 눈이 시뻘게져서 역정을 내는 어머니였다. 


“서방이 있나, 일가친척이 있나, 너 하나만 믿고 사는 이년의 팔자에 너조차 밤낮 어디로 간다고만 하니 난 누굴 믿고 사냐?”


어머니의 넋두리는 인제 귀에 못이 박일 정도였다. 


사주라면 사족을 못 쓰던 할머니는 성기가 세 살 났을 때 보인 그의 사주에 역마살이 들었다 하여 한때는 얼마나 낙담을 했던 것인지 모른다. 이에 할머니는 성기에게 열 살 때부터 절에 넣어 살을 떼려고 해 보았던 것이며, 인제 역마살도 거의 다 풀려 갈 것이라고 은근히 마음을 늦추시는 편이었다. 


성기의 어머니는 절에 들어가서도 다 못 뗀 역마살을 성기에게 책 장사를 시켜서 풀어 볼 속셈이었다. 성기로서도 불경보다는 암만해도 이야기책에 끌리는 눈치요. 절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장사라도 해 보고 싶다는 소청이기도 하여, 멀리는 가지 말고 꼭 화개장만 보이기로 다짐을 받은 뒤 그에게 책전을 내어 주기로 했던 것이다.

- 김동리, “역마驛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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