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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크Beloch는 「그리스 역사」에서 오르페우스 종교에 관하여 설명한 후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그러나 그리스 민족은 너무나 젊은 활력으로 충만하였고, 이 세계를 부인하고 실재의 생을 피안彼岸에 두는 한 가지 신앙만을 무조건 받아 들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오르페우스 종교는 비교적 좁은 범위의 입교자入敎者들 사이에 국한되어 있었다. 아테네와 같이 신비종교의 의식을 국가제전에까지 도입하여 법적 보호 밑에 두게까지 된 사회에서조차 국가종교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이런 이념들이- 완전히 다른 신학의 옷을 입고 나타나 그리스 세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기까지 완전히 천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은 지나친 견해인 것 같다. 특히, 엘레우시스 신비종교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엘레우시스 신비종교는 오르페우스주의의 요소를 받았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종교적 기질을 가진 사람은 오르페우스주의에 기울어졌고, 합리주의자들은 그것을 멸시했다. 우리는 이 상태를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영국의 메서디스트교Methodism의 상태와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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