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 사상 조각/파르메니데스

말과 말의 의미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의 차이

이제, 한 상상적인 인물을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가령 햄릿을 예로 들자. “햄릿은 덴마크의 왕자였다.”라고 할 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참이다. 그러나 단순한 역사적 의미에서는 아니다. 참된 진술은 이렇게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말하기를, 햄릿은 덴마크의 왕자였다고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표현하면 여기에는 상상적인 요소가 조금도 들어가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나 덴마크나 햄릿이란 소리는 모두 실재한다. 그러나 햄릿이란 소리는 실재의 이름은 아니다. 왜냐 하면, 아무도 햄릿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햄릿은 한 상상적 인물의 이름이다.”고 한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바르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햄릿은 한 실재하는 인물의 이름이라는 것이 상상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햄릿은 상상된 한 개인다. 일각수一角獸는 상상적 동물의 일종이다. '일각수'란 말이 들어간 문장 가운데 어떤 것은 참이다. 그리고 어떤 것은 거짓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 있어서든지 직접적으로 참되고 거짓된 것은 아니다. “일각수는 뿔이 하나다.”와 “소는 뿔이 둘이다.”를 생각해 보자. 이 후자의 진술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만 소를 한 번 주목하여 보기만 하면 된다. 어떤 책에 보면 소는 뿔이 둘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 말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러나 일각수는 뿔이 하나라는 증거는 다만 책에서만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실에 있어서 바른 진술은 이렇게 될 것이다. “어떤  책에 보면  뿔을 하나만 가지는 일각수라고 불리는 동물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일각수에 관한 진술 전체가 실제로 '일각수'란 말에 관해서이다. 이것은 햄릿에 관한 진술이 모두 '햄릿'이란 말에 관한 것인 것과 똑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말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들이 의미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것은 또다시 파르메니데스의 논의로 되돌아가게 한다. 즉, 만일 어떤 말을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다면 그 말은 어떤 사물을 의미해야 한다. 즉, 아무것도 의미하는 사물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말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