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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 조각/프로타고라스

아테네와 스파르타 대립

기원전 414년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시라쿠사Syracuse를 점령하려고 대원정군을 보냈다. 그러나 이 일은 실패를 보았다. 전쟁은 아테네 사람들을 난폭하고도 맹렬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416년에 멜로스Melos 섬을 정복했을 때, 거기에 있는 적령기의 사람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학살하였고, 나머지 주민들은 노예로 만들었다.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성Trojan Woman』은 이러한 야만주의에 대한 항의였다. 이 알력은 사상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 하면, 스파르타는 과두정치의 투사였고,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투사였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귀족들 가운데 모반이 일어날까 염려할 이유가 있었다. 기원전 405년에 아이고스포타모이AegosPotamoi 해전의 마지막 패전은 아테네 귀족들의 일부 역할에 기인한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었다.


이 전쟁 후에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과두정부를 설립하였다. 이것이 소위 '30인 폭군Thirty Tyrants'이다. 이 30인 가운데 몇 사람은 그 두목인 코리티아스를 포함하여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응당 인기가 없었다. 그리하여 1년도 가지 못하고 전복되었다. 스파르타의 승낙하에 민주주의는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는 쓰라린 민주주의였다. 내부의 원수들에 대한 직접적 복수를 금하는 특사령을 내고서도, 원수들을 복수하려 할 때는 이 특사령이 적용되지 않는 구실을 쉽사리 꾸미기도 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과 사형이 집행된 것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