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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와 사상/동양 윤리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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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망하면 백성도 망한다." - 74세에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 왕조의 명운이 기울던 조선 시대 말, 대학자이자 애국애민 정신이 드높았던 최익현은, 74세의 노인임에도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적지 쓰시마 섬으로 끌려가 단식 끝에 순절하였다. 일화에 의하면, 최익현의 신발 속에는 항상 흙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흙은 쓰시마 섬으로 끌려갈 때 몰래 가지고 간 우리나라의 흙으로 조금씩 신발에 깔아서 다닌 것은 일본의 흙은 밟지 않겠다는 무서은 결의를 보여 준다. 최익현은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독립 정신과 살신성인하는 마음으로 나라에 충정을 다하는 높은 뜻을 실천하였다. 그를 본 일본의 헌병 소령은 "한국에 이런 사람이 50명이라도 있으면 독립이 공연한 말 이상의 무엇인가를 의미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쓰시마 섬으로 끌려갈 당시의 모습으로, 올곧은..
19세기 말의 위정척사와 개화 사상 19세기 말 조선 사회는 서구 열강의 침투와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전통 사회의 기반이 흔들리고, 전통적인 가치관이나 윤리 사상을 상실할 위기에 놓였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처해 나가려고 등장한 것이 바로 위정척사와 개화사상이다. 19세기 중엽에 접어들어 서구의 문화가 밀물처럼 들어오자, 이항로와 기정진을 비롯한 위정척사를 주장한 학자들은 유학적 윤리 의식의 붕괴를 깊이 우려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서양의 종교와 문물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척양斥洋·척왜斥倭의 강력한 의리론을 주장하였다. 위정척사 사상은 서양과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침략이 노골화하면서 반외세적 민족주의 형태를 갖추었고, 일본의 침략과 굴욕적인 외교에 반대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으며, 점차 반일 의병 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반면에, 서구 문화에 ..
근대 한국 유교 사상의 다양한 경향 - 강화학파 근대에 접어들어 한국 유교 사상은 다양한 학문적 경향이 지속하는 가운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학문적 경향이 공존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리고 당시의 시대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데 주력하였다. 먼저 주목되는 것은 성리학 일변도의 사상 흐름에 밀려 표면화하지 않았던 양명학적 학풍을 계승한 사상이다.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라고 불리는 이들은, 정제두鄭齊斗(1649~1736)가 은거한 강화 지역에서 그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양명학을 수용하면서도 특정한 문호를 세우지 않았고, 도교와 불교까지 수용하였으며, 국학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고려하여 철저하게 자기 내면에 충실하라고 주장하면서, 참된 자아의 각성과 생활 속의 실천을..
정약용의 성기호설性嗜好說 -맹자요의孟子要義 정약용은 인간의 성性을 어떤 구체적 대상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기호로 파악한다. 그가 말한 바로는 기호에는 영지靈知의 기호와 형구形軀의 기호가 있다. 영지의 기호란 우리가 선을 즐거워하고 악을 미워하며 덕행을 좋아하고 더러움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다. 이것이말로 인간만이 가지는 본성이며, 하늘이 명한 성품이다. 형구의 기호란 우리의 눈이 좋은 빛깔을 좋아하고 입이 맛있는 요리를 즐기며,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는 것읍 좋아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이것은 동몰도 가지는 품성이다. - 정약용, "맹자요의孟子要義" -
실학의 인간관과 윤리관 실학자들은 자연법칙과 도덕적인 원리가 결부되어 있다는 성리학자들의 이론, 즉 성즉리性卽理 명제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였다. 인간의 감정에서 드러나는 욕구를 불순하게 여기는 성리학의 엄격한 금욕주의적 수양론에서 벗어나 인간 감정의 순수성을 믿는 생각이 제시되었다. 자연 앞에 독존獨存하는 자율적인 인간을 믿고, 이러한 인간이 평등하게 욕구를 발현하여 충족하는 인간상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실학자들은 윤리와 도덕을 필연적 법칙이 아닌 인위적이고 가변적이며 상대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는데, 이에 따라 예禮나 도덕의 형식보다 때에 맞추어 실천하는 노력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대표적인 실학자인 정약용은 마음이 어떤 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경향성, 즉 마음의 기호嗜好로서 성性을 이해하였다. 그는 인간에게는 선을..
실학적 인간관의 전개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의 절대화 경향이 뚜렷해지는 가운데 소모적인 학슬 논쟁이나 명분과 형식에 매달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게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戰亂을 겪고서 사회 전반에 걸쳐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일단의 개혁을 주장하는 학문적 경향이 대두하였다. 이른바 '실학實學'으로 불리는 이 학문적 경향은 비록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세계관과 인간관, 도덕 윤리관 등을 제시하였다. 실학은 유교 본래의 실재성 중시 태도를 표방하였다. 학문적으로 청淸나라에서 유입된 서양의 자연 과학과 종교 사상을 수용하고, 성리학과 성격이 다른 양명학과 고증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학문 방법에 있어서는 박학博學을 중시하는 백과사전식 방법론, 원시 유학의 실제성 추구 정신의 ..
이황과 기대승의 사단 칠정 논쟁 - 이기론 논쟁 사단 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에 대해 이황이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수정을 가한 것에서 비롯하였다. 이황의 사단 칠정에 대한 이 해석이 알려지면서 여러 학자 간의 논란이 제기되었고, 6년이 지나고 나서 이황이 자신의 사단 칠정설에 비판적인 논의를 제기한 기대승奇大升에게 짤막한 편지를 보내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고, 이에 대해 기대승이 화답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양자 간의 논쟁 과정에서 이황은 애초 자신의 해석을 수정하는 등 체계화한 이론을 제시하였고, 기대승도 주자학에서 제시한 이기론의 원칙에 따라 날카롭게 자신의 견해를 밝혔지만, 논쟁을 마무리하면서 이황의 입장에 동조하였다. 하지만, 양자 간의 논쟁은 확실한 결말을..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론 이황과 함께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로서 이이를 들 수 있다. 그는 이황이 해석한 사단 칠정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사단과 칠정 가운데 선한 일변을 가리킨다고 보아 사단은 칠정에 포함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하고 이가 탄것[氣發理乘]'으로 보았다. 그가 '기의 발'만을 인정한 것은 순수한 도덕적 원리인 '이'는 절대적이고 순선한 형이상의 존재이므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이는 '이통기국理通氣局'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여 자신의 주장을 더 구체화하였다. '이'는 형체가 없어서 보편적으로 실재한다는 '이통'을 통해 선의 본체는 어디에나 존재하여 변함이 없음을 밝히고, 기는 형체가 있어서 제한적이라는 '기국'을 제시하여 기의 불완전함과 가변성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