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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 조각/원자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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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대한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철학적 입장 데카르트Descartes의 논의는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의 논의와 마찬가지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연장延長extension은 물질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물질은 어디나 존재한다고 하였다. 그에게는 연장은 한 형용사이고, 실체적인 것은 아니다. 연장의 실체가 물질이다. 그리고 실체 없이는 연장도 존재 할 수가 없다. '빈 공간empty space'이란 그에게 있어서는 불합리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행복을 느끼는 존재자 없는 행복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말이었다. 라이프니츠Leibniz는 약간 다른 입장에서 충만plenum이란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공간이란 관계의 체계라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에 관하여 그와 뉴턴 사이에 유명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후에는 클라크Clarke가 뉴턴 편을 대표..
공간과 진공에 대한 논의 이제 우리는 이 문제의 그 후 발전에 관하여 고찰하여 보자. 논리적 곤란을 피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물질matter과 공간space을 구별하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공간은 무無가 아니고, 그 속에 어떤 물질이 들어 있든지 안 들어 있든지 일종의 저장소와 같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공이 존재한다는 학설은 장소의 존재를 포함한다. 왜냐 하면, 우리는 진공을 물체가 제거된 장소place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견해는 뉴턴이 가장 분명하게 내세우고 있다. 그는 절대공간absolute space의 존재로 주장한다. 따라서, 절대적 운동과 상대적 운동을 구별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논쟁에서는 양편이, 즉 천동설天動說과 지동설地動說을 주장하는 쪽 둘 다가(그들이 위의 ..
파르메니데스와 원자론자의 진공론 그런데 비존재not-being를 반대한 파르메니데스의 논의는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운 것 같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같이 보이는 곳에도 공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의 논의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 진공의 존재 문제는 논리와 일상 행해지는 관찰과의 혼란된 혼합의 한 좋은 실례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을 이와 같이 말할 수가 있다. "우리는 진공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공은 무無는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진공이 아니다." 원자론자들이 이 논의에 대하여 답변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다만 운동이란 것은 경험적인 사실이며, 따라서 비록 진공이란 것이 생각하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입장에서 파르메니데스의 논의를 무시할 것을 선언하고 있을 뿐이다.
원자론자들의 운동에 대한 견해 이상에서 한 가지 점에대해서는 누구나 다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즉, 충만한 것plenum에는 운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모두가 다갈이 오류를 범하고 있다. 충만한 것 속에서도 선회운동cyclic motion은 가능하다. 단, 그 운동이 언제나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되고 있는 것은, 어떤 사물은 다만 공간 속으로만 이동하여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충만한 것 속에는 공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는 아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충만한 것에 있어서는 운동이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그러나 결코 운동이 일어날 수 없다고는 주장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파르메니데스의 부동不動의 세계를 인..
레우키포스의 존재론 그러나 레우키포스는 자기는 지각과 조화되며, 사물의 생성과 소멸, 운동과 다양성 등을 폐지하지 않는 학설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즉, 그는 지각perception의 사실에 대하여 이상과 같은 양보를 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일원론자들monists과 타협하여 진공void이 없이는 운동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학설을 제기 하였다. 진공은 비존재not-being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어떤 부분도 비존재는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재하는것은 그 말의 엄격한 의미로는 절대 충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충만은 하나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그 수에 있어서 무한히 많다. 그리고 그 부피의 미소함으로 인하여 보이지 않는다. 이 다many는 진공 속에서 운동한다. 왜냐하면, ..
아리스토텔레스의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견해 레우키포스도 그의 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같이 파르메니데스의 논의와 운동과 변화의 자명적인 사실을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견해들은, 특히 파르메니데스의 견해는 변증적 논의를 따라 논리적으로 전개되어 있는 것 같으나, 그의 견해를 따르는 것은 사실들을 고찰할 때는 광증狂症의 다음 가는 일인 것 같다. 대개 어떤 정신병자도 불과 얼음이 '하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 일부 사람들이 미쳐서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관습으로 인해 바른 것과 바른 것같이 보이는 것의 차이를 분간치 못하는 정도이다.
원자론자들의 학설은 경험적 관찰 요소를 배제함 원자론자들이 이 학설을 세운 것이 전적으로 경험에 입각해서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원자론은 오늘날에 있어서 화학의 여러 사실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생각났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고대에는 경험적 관찰과 논리적 논의를 확연히 구별 짓지 못하였다. 파르메니데스는 '사실'들을 경멸히 여긴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는 그들의 형이상학을 물시계나 돌아가는 물 양동이에 대한 관찰 등과 결합시켰다. 소피스트 때까지는 어느 철학자도 완전한 형이상학과 우주론은 많은 추리와 어느 정도의 관찰을 종합하면 된다는 것을 의심한 것 같지 않다. 다행히 원자론자들은 2000년 후에 어떤 확증이 발견되게 된 한 가설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
목적론적 설명과 기계론적 설명의 인식 범주 목적론적 설명에 관하여 생각해 볼 때, 이 설명은 얼마 진행되기 전에 곧 창조자 또는 적어도 그의 목적이 이 자연의 발전 과정 속에 나타나게 되는 그 창조자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철저하게 목적론적으로 되어서, 그러면 이 창조자는 무슨 목적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을 계속 추구할 것 같으면, 이 추구는 분명히 경건치 못한 것으로 되어 버린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무의미한 질문이다. 왜냐 하면, 이 질문이 의미를 가지려면 우리는 이 창조자까지도 창조한 어떤 초창조자를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목적의 개념은 다만 실제 내에서만 적용되는 것인지 실재 일반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기계론적 설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논의가 적용된다. 한 사건은 다른 한 사건의 원인이 되어 결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