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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 조각/프로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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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들의 논의 방향 소피스트들이 일반 대중이나 플라톤, 그 후의 철학자들에게 산 반감은 어느 정도까지는 - 이 정도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 소피스트들의 지적 장점에 기인한다. 진리를 추구할 때 만일 진심으로 추구하고 있다면, 도덕적 고려도 무시해 버려야 할 것이다. 진리가 반드시 현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어떤지는 미리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소피스트들은 논의의 결과를 어디로 이끌어 가든지 그 논의를 따라갈 용의를 가지고 있었다. 흔히 그들은 회의주의에 빠져들어 갔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인 고르기아스Gorgias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으며, 또 존재하고 그리고 설사 어떤 사람이 그것을 알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
소피스트들과 철학자들의 차이점 프로타고라스는 그의 장년 시절을 그리스의 여러도시를 역방歷訪하면서 일종의 순회 강연을 하였고, 보수를 받고서 '실용적 능력과 고도의 정신수양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가르쳤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오늘날의 소위 신사인 체하는 태도로 가르치고 돈을 받는 일을 비난하고 있다. 플라톤 자신은 충분한 개인적 재산, 기타 다른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그런 행운에 처하지 못한 사람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봉급받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교수들이 플라톤의 보수를 받고 가르친다는 비난을 항상 반복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이 그 시대의 다른 철학자들과 다른 점이 또 하나 있다. 소피스트 이외의 다른 스승들은 모두 학원學園을 창설하였다. 거기에는 다소간의 ..
프로타고라스의 실용적 특성 실용주의實用主義pragmatism의 창시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실러F.C.Schiller는 자기를 항상 프로타고라스의 제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플라톤이 『테아이테투스』에서 프로타고라스를 설명하여, 어떤 의견은 그것이 다른 의견보다 더 참될 수는 없으나 더 나을 수는 있다. 예컨대, 황달에 걸린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노랗게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사물들은 실제로 노랗지는 않고. 건강한 사람에게 보이는 색이 실제의 색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건강이 질병보다 좋다고는 말할 수가 있다. 따라서 건강한 사람의 의견이 황달에 걸린 사람의 의견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분명히 실용주의에 가깝다. 객관적 진리를 의심한 결과는 실제의 경우에는 대다수를 심판자로 하여 사태를..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학설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는 기원전 500년경에 데모크리토스의 고향인 아브데라Abdera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테네를 두 번 방문했는데, 그의 두 번째의 방문은 기원전 432년 이후의 일은 아닐 것이다. 또, 기원전 444~434년에는 투리Thurii 도시의 법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그는 불경건의 죄명으로 처벌을 받았다는 전설도 있으나, 이것은 사실인 것 같지 않다. 물론 그는 『신들에 관하여On the Gods』란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도 하였다. "신들에 관해서는, 나는 신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 또는 그들이 어떤 형상인지 확실하지 않다. 왜냐 하면, 신에 관해서는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점이 많이 있다. 즉, 이 문제 자체의 애매함이라든지, 인생의 짧음 등이 확실..
소피스트와 법정의 관계에 대한 예화 프로타고라스에 관하여,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그 시대의 일반 사람들이 소피스트와 법정의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를 설명하여 준다. 어떤 청년을 가르치는데, 만일 그 청년이 그의 첫 소송 사건에 이기면 수업료를 받고, 만일 지면 수업료를 받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 청년의 첫 소송 사건의 결과는 포로타고라스가 그 청년에게 수업료를 돌려주어야 할 그런 결과였다고 한다.
소피스트의 기술 족보에 대한 추적 플라톤의 심각한 소피스트 비판은 그의 '대화편' 『소피스트The Sphist』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대화편'은 정의定義definition에 대한 논리적 논의이다. 여기서 소피스트를 예로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논리를 문제로 삼지는 않겠다. 여기서, 이 '대화편'에 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마지막 결론이다. 소피스트의 기술의 족보를 다음과 같이 추적하여 가는 사람은 즉, 자가모순自家矛盾을 일으키게 하는 기술을 의식 내지 모르는 체하는 부류에 속하는 허위의 모방이며, 창조의 명상을 만드는 부문에 속하는 환상의 부류와도 구별되는 말의 희롱, 즉 인간의 장난, 이와 같은 것이 소피스트의 사실상의 기술로서, 그 형통과 족보를 확인하는 사람이야말로 진리를 안 사람이다.
아테네에서 소피스트들의 역할과 논리 아테네 같은 사회에서는 민주주의적인 정치가들의 적개심을 살 만한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변론술을 얻으려고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을 박해하는 데 열중하였으나, 한 가지 점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미국보다도 더 자유로웠다. 즉, 불경건이나 청년을 타락시키는 죄로서 고소당한 사람도 그들 자신을 위하여 변명하고 탄원할 길이 허락되었다. 이것은 소피스트들이 어떤 계급, 즉 귀족계급에게는 인기를 가지나 어떤 계급, 즉 빈민 계급 내지 민주주의자들에게는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을 설명하여 준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생각으로는 더 공정한 목적을 위하여 일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의 대다수가 순전히 철학에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을 비웃고 비방하는 데 열중..
페리클레스 시대의 종말 아테네 역사상 페리클레스 시대는 영국 역사에 있어서 빅토리아 왕조와 유사하다. 아테네는 부유했고, 강했고, 전쟁이 없었고, 귀족계급이 통치하는 민주주의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낙사고라스와 관련하여 우리가 이미 고찰한 바와 같이, 페리클레스의 적대자들은 차츰 힘을 모아 페리클레스의 친구를 한 사람 한 사람 공격하여 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에 발발되었다. 아테네는 다른 여러 곳과 함께 역병疫病에 의해 황폐해졌다. 230,000명 가량이던 인구는 대폭적으로 감소되어 다시는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지 않았다.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30년에 관직에서 추방당하고, 공금을 점령했다는 이유로 1,501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법정에서 벌금처벌을 받았다. 그의 두 아들은 역병으로 죽었고, 자신도 다음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