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서양 사상 조각/프로타고라스18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지배권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역사에 관한 개관은 플라톤 및 그 후의 그리스 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할 것이다. 제 1차 페르시아 전쟁시 승리의 영예는 주로 아테네로 돌아갔다. 그것은 마라톤에서의 결정적인 승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10년 후인 제2차 페르시아 전쟁시에는, 해상에서는 역시 아테네가 그리스 사람들의 주동력을 이루었으나 지상에서는 주로 스파르타 때문에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 이 때, 스파르타는 그리스 세계의 지도자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그 견해가 편협하여 지역적이었고, 페르시아 세력이 유럽 지역, 즉 그리스에서 쫓겨난 후로는 페르시아에 적대하기를 그쳤다. 그리하여 아테네만이 계속 아시아 지역 그리스의 투사가 되었고, 페르시아에게 정복되었던 여러 섬들의 해방도 아테네가 계속 담당했으며,.. 2015. 8. 22. 기원전 5세기 아테네가 주동하는 그리스 반도 기원전 5세기 동안에 - 소피스트들이 이 변화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든지 간에 - 아테네에서는 엄격한 청교도적 순진성으로부터 기지에 빠른 잔인한 냉소주의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여기에는 기지는 빨리 돌지 않으나 마찬가지로 잔인한 파괴적 정통주의의 경향도 없지는 않았다. 이 세기 초에 페르시아에 대한 이오니아 여러 도시의 투사 아테네가 등장하게 되며, 기원전 490년 마라톤Marathon의 승리를 얻게 된다. 이 세기 말, 기원전 404년에는 스파르타에게 아테네가 패배하고 기원전 399년에는 소크라테스의 박해가 일어난다. 이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잃게 된다. 그러나 문화적 우위는 논의의 여기가 없었고 기독교의승리까지 존속되었던 것이다. 2015. 8. 13. 아테네의 정치학설들 기원전 5세기 말의 아테네에는 그들의 동시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금일의 민주주의 국민에게도 비도덕적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 그런 정치학설을 가르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국가론Republic』 제 1권에 트라시마쿠스는 강자의 이익 이외에 또 다른 정의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논의한다. 그리고 법률은 정부가 그들의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힘과 힘의 투쟁에 있어서 재판관이 될 만한 공정한 표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플라톤의 『고르기아스Gorgias』에 보면, 칼리클레스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자연법은 강자의 법률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편의상 강자를 제외할 제도와 도덕적 규정을 만들었다. 이런 학설은 고대보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더욱 찬동자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 그.. 2015. 8. 4. 플라톤 철학에서 논의를 진술하는 악습 플라톤은 그 견해를 진술할 때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덕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지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결코 지적으로 정직했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사회적 결과를 고려하면서 학설을 세우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는 실지로 자기 논의를 덕스러운 결과가 되도록 왜곡하면서도, 자기는 순수한 이론적 표준을 따르고 또 그것으로 판단하는 체한다. 그는 이와 같은 악습을 철학에 도입하였다. 그 후에는 이런 악습이 계속 존속하여 왔다. 플라톤은 소피스트에 대한 적개심에서 그의 '대화편'에 그와 같은 특성을 주게 되었던 것 같다. 플라톤 이후의 모든 철학자들의 공통적 결함은, 그들의 윤리 문제의 탐구에 있어서 미리 어떤 결론에 도달해야 하겠다는 것을 예상하여 놓고 논리.. 2015. 7. 26. 이전 1 2 3 4 5 다음 반응형